권력의 정점에서 믿을 놈 하나 없다. 더 킹 : 헨리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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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을 듣자마자 1989년 작 ‘헨리 5세’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케네스 브레너가 한창 파릇파릇하던 시절에 셰익스피어 원작을 바탕으로 각본, 감독, 주연까지 커버하면서 만든 영화였는데, 중학생 때 봤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잘 기억이 나네요. 북 치고 장구치고 노래까지 하는데 셋 다 웬만큼 실력이 되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특히나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 앞에서 연설하는 대사는 누가 저한테 지금까지 본 영화 명대사를 몇 개 꼽아보라면 반드시 언급할 만한 내용입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이상하게 네이버 평점이 낮은데, 개인적으로 진짜 여러 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역으로 잠깐 등장했다는 크리스찬 베일을 찾는 재미도 있고 말이죠. 전 아직 못 찾았습니다만…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습니다. ‘더 킹 : 헨리 5세’는 앞서 언급한 ‘헨리 5세’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원작을 영화로 옮긴 영화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명백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전 영국 사람도 아니고 원작을 본 적도 없으니까요(마침 ‘나랏말싸미’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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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많습니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내의 성장기를 보여줍니다. 지도자의 혈통을 거부하고 애써 방탕한 생활을 살아온 주인공 할은 하루 아침에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되어 버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순탄치 않습니다. 과거의 온갖 기행들 때문에 신하들로부터 인정받기는 커녕 술꾼 내지는 꽐라 취급이나 당하죠. 주변국의 왕들은 대관식 파티에 조롱 섞인 장난감들을 공들여 포장해 선물이랍시고 바칩니다. 다행히 본성 자체가 지나치리만큼 냉철하고 소신있는 탓에 자신을 좌우앞뒤로 흔들어 대는 온갖 난기류들에도 불구하고 선대 왕인 아버지가 헤집어 놓은 일반쓰레기 봉투를 꽤나 수려하게 분리수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쉽게도 집안 정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집에서 인정받으려면 나가서 돈을 벌어 와야죠. 결국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대의명분을 찾아 나서고, 승리가 불가능한 전투에서 목숨을 내놓고 처절하게 칼춤 추면서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수령해 왔습니다. 이제 진짜 집안의 가장…아니, 영국의 왕으로 인정받은 순간에, 안에서부터 싸그리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토록 믿고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정의가 결국은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했고, 충성스러운 조력자는 충신이 아니라 거의 뭐 최순실이었습니다. 평생을 믿어온 유일하게 친구라 부를 만한 사내는 자신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결국 먼저 요단강 건넜습니다. 이제 의지할 사람은 자신이 무너뜨린 적국의 공주이자 아내가 된 낮선 여인밖에 없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 영예롭고 기쁘기는 커녕 처절하고 철저하게 쓸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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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들이 화려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똥차게 잘 캐스팅했습니다.

주인공 할 역할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아예 난생 처음 본 배우인데, 캐스팅한 사람 상 줘야 된다고 봅니다. 첫 인상만 봤을땐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과묵하고 유약해보이는 청년’ 이미지였습니다. 얘가 전투씬에서 칼질은 잘 하려나…싶을 정도였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미묘하게 날 선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후반부로 가서는 그토록 비난해 마지않던 아버지가 지녔던 광기와 잔혹함도 조금씩 튀어나옵니다. 이 양 극단의 모습을 너무나 설득력있고 자연스럽게 묘사하면서 감정이입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잘 생겼습니다. 인정.

할의 조력자 존 역할을 맡은 조엘 에저튼을 빼 놓을 순 없죠. 극을 메인으로서 이끌어 가는 역할은 아니지만 비중이 상당합니다. 필력이 딸려서 적절하게 묘사하기는 힘들지만, 비유하자면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알프레드 + 폭스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방황하는 주인공을 이끌어 주는 멘토 같은 인물이죠. 할이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존의 부재를 가장 뼈아프게 안타까워하게 되실 겁니다. 조엘 에저튼은 각본과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제 이 양반 이름 써 있는 영화는 고민 안 하고 그냥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트와일라잇 얘기 그만 해도 되겠는데요.

로버트 패틴슨은 이제 그만 까도 될 것 같습니다. 진짜 싸가지없으면서도 잔혹해 보이는 중간보스 역할 정말 잘 소화했습니다. 극 중 프랑스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발음의 영어로 대화할 것을 고집하면서 영국을 시도 때도 없이 까는데 이게 꽤나 재밌습니다. 여기서는 명품 조연이에요.

근데 이 분 영국 사람이었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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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니 뜬금없이 체스가 생각났습니다. 체스에서 확실히 왕은 가장 중요한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데 막상 체스판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별 거 없죠. 옆에 늘어선 다른 말들은 좌우 사로 하나씩 먹고 전후좌우 대각선으로 64칸을 조지고 다니는데 말입니다.

맨 처음 언급했던 ‘헨리 5세’와 비교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만, 예상했던 영웅의 일대기와는 전혀 방향이 다른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중세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과 그 중심 인물들을 소재로 삼았을 뿐이고, 실제로는 휘몰아치는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낱 장기말처럼 소비된 젊은 사내의 고뇌와 방황을 다룬 정치 드라마 같았습니다.

제가 권력의 정점에 설 날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 보고 나니 출세해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말로 안타깝고 쓸쓸합니다. 그 기분을 정말 잘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지…

아서 플렉의 비극적인 일 주일. 단체 조커 관람기


포스터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 착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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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일인 10/2 수요일 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싸롱 멤버 3인과 게스트 1인(반가워요 Dave!)이 서현 메가박스 앞에 집결했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뭐 이 정도 기대작이면 개봉 당일날 봐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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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만족스럽고, 즐기기 어렵지 않은 영화였습니다(바로 이전에 관람한 영화가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였습니다. 상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핏발 세웠던 거에 비하면야…). 다만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한 마디 남기려면 상당히 심란할 거에요. 유튜브에 올라온 리뷰어 분들의 영상을 몇 편 찾아보실 것을 추천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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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 달 전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금연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관람 직후 금연에 실패했습니다.

이 아래부터는 애매하게 영화 내용을 좀 언급할 예정입니다. 아직 영화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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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막장드라마에서 밥먹고 똥 싸듯이 빈번하게 언급되는 주요 장치가 이 영화에서도 등장합니다. 다만 막장드라마 버전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반전에 반전을 가하면서 이 장치의 사실관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호하게 열린 해석을 관객에게 제공하지요(마침 이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에 넘쳐나고 있더군요). 그리고 영화 후반에서 결국 이 장치의 진위여부는 뭐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딱히 막장드라마를 까려는 것도 아니고 저도 막장드라마 참 좋아합니다만, 같은 장치를 이렇게 세련되게 사용한다면 좀 더 몰입해서 즐길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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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필적 감정 가능하신 분들이 주변에 계시다면 꼭 같이 영화를 관람하세요.
만약 없다면, 캘리그라피 배운 분들이라도 좀 모셔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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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플렉의 고난은 개인적으로 경험했거나, 또는 관찰자로 바라봤던 비참했던 사건이나 상황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해서 마음이 조금 괴로웠습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주인공을 아예 응원하고 싶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자신을 둘러싼 문제의 원인들을 해결(…)해 가는 모습과,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키고 새로운 상징으로 완성되는 장면에서는 죄의식으로 충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겁니다.

물론 주인공이 잘 했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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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플렉을 제외하고) 극중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약간의 조롱, 약간의 경멸, 약간의 책임 전가, 약간의 쌀쌀맞음, 약간의 방관을 저질렀을 뿐이죠. 그리고 아주 다 같이 절단이 났죠. 모두 사이좋게 비극적인 사건의 책임에 대한 지분을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어설픈 코미디를 보고 조롱거리로 삼는 대신 약간의 응원 한 마디라도 해 줬다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울먹거리며 찾아온 사내를 한번 안아주기라도 했다면,
뭐 누구든 어찌 됐든 손 한번 잡아주고 응원 한 마디라도 건네 줬다면
이 정도 파국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약간의 호의조차 인색한 세상이지만,
내일부터는 조금이나마 착하게 살아봐야겠다 다짐해 봅니다.

진짜 초등학교 독후감같은 결론을 써놓고 보니 조금 낮뜨겁네요…

뒷풀이는 역시 술 + 오늘만 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