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나이 먹고 다시 보는 사이버 포뮬러

1996년에서 바라본 2019년의 헤어스타일.

며칠 사이, 언더싸롱에 틀어박혀서 한 고전 애니메이션을 주구장창 정주행하고 있습니다. 저와 동년배인 분들은 꽤나 익숙한 이름일텐데요. KBS 2TV에서 ‘영광의 레이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SBS에서 ‘사이버 포뮬러’라는 이름으로 후속편이 방영되었던 작품입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최첨단 기술을 쏟아부은 자동차를 모는 레이서들의 경쟁과 우정, 좌절과 암투가 주된 내용인데요.

주인공 카자미 하야토는 어린 나이에 데뷔한 천재 레이서이며, 역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아버지가 직접 설계한 포뮬러 머신 ‘아스라다’의 드라이버입니다. 전형적인 금수저에 고인물이죠. 이 아스라다라는 자동차에 대한 설정이 상당히 참신합니다. 엄밀히 말해 ‘아스라다’는 자동차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이 자동차에 탑재된 AI를 지칭하는데요. 레이스를 진행하는 와중에 드라이버인 하야토와 AI인 아스라다는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류하면서 전술적으로 행동하고, 경주 중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이슈를 풀어나가기 위해 서로 대립하고 부딪혀 가면서 최적의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스라다도 기술적인 도약을 이루지만, 주인공 하야토도 실력 상승과 더불어 인격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솔직히 중반부 주인공 인성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에요. 머신러닝도 하면서 인성도 오져지는데 이거야말로 창조경제 아니겠습니까.

모터스포츠를 테마로 하지만 소년만화 내지는 능력자 배틀물(?) 성향이 뒤섞인 만큼, 다양한 악역들이 등장하는데요. 가장 인상적인 악역 중 하나는 ‘필 프리츠’ 입니다. 프리츠 역시 동일하게 인공지능이 탑재된 ‘알자드’라는 머신의 드라이버인데요. 이 알자드의 컨셉은 아스라다보다 더욱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알자드는 기본 성능 자체가 아스라다보다는 몇 수 위에 위치하는데요. 어마어마한 성능을 바탕으로 모든 상황을 자기가 판단하고 통제합니다. 드라이버의 의견은 아예 묻지도 않아요. 그럼 뭐 이 차는 요즘 나오는 자율주행 차량 쯤 되는건가 싶으실 텐데, 그렇게 보기도 애매합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죠.

알자드는 주행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드라이버인 프리츠에게 무려 ‘명령’을 내립니다. 문제는 프리츠에게 거부권이나 자유의지 같은 건 없어요. 운전석에 앉아 양 팔 다리에 기계 팔이나 광케이블 같은 걸 잔뜩 장착하고 알자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알자드가 ‘왼쪽으로 핸들 반 바퀴 꺾어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프리츠의 팔에 전기적인 자극 같은 걸 보내서 핸들을 꺾게 만듭니다. 알자드의 명령에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프리츠는 정기적으로 신경계통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약물을 투약합니다. 빠른 속도에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패시브 효과도 있죠. 익히 예상하시다시피 사이드이펙트는 상상을 초월하며, 시즌이 계속될수록 프리츠의 육체와 정신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악역의 마음을 표현할 적절한 이미지가 없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썸녀랑 카톡으로 분위기 잘 타고 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시리나 클로바 따위가 제멋대로 여러분의 손가락을 조종해 카톡을 보내서 킬링 멘트를 날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관계가 잘 풀리든 아니든 결과와 상관 없이 기분은 좀 많이 더럽지 않을까요…

이 애니메이션은 1996년에 제작되었고,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근 미래는 재밌게도 2015년~2019년에 해당됩니다. 과연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동반 성장을 이루게 될까요, 아님 기술로부터 도태될까요. 어릴 적에는 아무 생각 없이 즐겼던 애니메이션인데 대가리 크고 보니 시사하는 바가 참 많은 작품, 사이버 포뮬러였습니다.

4 Replies to “차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나이 먹고 다시 보는 사이버 포뮬러”

  1. 처음에 개그 글로 읽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에는 묵진한 한방 있네요 ㅎㅎㅎㅎ

    그 시절에 머신러닝의 개념과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예상해본 띵작이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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